■무엇을 행해야합니까? ■눅 10장 25-37절 ■2021.4.18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생각해보세요.
사마리아인이 돕는 사람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된 사람입니다.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야기에서 어떤 주도적인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도와달라는 구조 요청을 못하고, 어디가 아프다는 말도 못합니다.
그냥 정신을 읽은 상태입니다. 상처에 기름을 발라 달라는 말도 못하고 포도주를 얼마큼 부어 달라는 말도 못합니다. 어디로 가서 어떤 치료를 해달라고 요구하지도 못합니다.
그냥 몸을 맡기고 사마리아인의 처분만 기다립니다.
우리가 사랑할수 있는 훌륭한 이웃은 이렇게,
나에게 아무 요구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이웃, 죽은 이웃이라는 거지요.
우리가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못하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나의 이웃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선뿐 아니라 악도 행할수 있다는 뜻입니다.
소설가 구병모 작가가 이웃을 소재로 <네 이웃의 식탁>이란 소설을 썼는데 여기서 이웃을
‘손을 뻗을 때마다 서로의 팔꿈치가 스치고 서로의 숨결이 닿는 사람들’ 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절묘한 표현입니다. 이웃은 나의 가까이서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팔을 뻗어 나를 도울수도 있지만,팔꿈치로 나를 때릴수도 있는 사람,
함께 숨을 쉬는 가까운 사람이면서, 숨결에 섞인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떠오르는 이웃은 나에게 어떤 불쾌감이나 어려운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내가 주는 도움을 받고 죽은듯 나에게 자기를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이웃은 죽은 이웃이 아니예요.
살아있어서 걸리적거리고 냄새를 풍깁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 내 영역을 침범해서 서로 이익이 충돌하고 나에게 자기 권리를 요구하고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친구도 배신할 수 있는 존재이고, 그분 말씀을 따라 사는 건 양이 이리떼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무능력을 경험하는 일인걸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행하라고 하십니다.
불가능과 무능력 속에서 말씀을 행하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실천을 주춧돌 삼아 포기하지 않고 인생이란 집을 지으면 그 집이 하나님이 임재하는 성전이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