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정치적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왜 이렇게 혼탁한지 모르겠습니다. 태국에서 국왕파와 옛 총리파가 유혈충돌을 벌이고 있습니다. 네팔에서도 정치적 갈등으로 국가전체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선거를 통해 정권이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넘어갔고 새 총리가 임명되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우리나라도 다음달 치러질 지방선거로 전국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모두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몸부림이겠지요. 하지만 화려한 명분과 치열한 몸짓에도 불구하고 이 모습들이 별로 감동스럽지 않습니다. 감동의 탄성 대신 허망한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은 왜일까요? 이번 주에 읽은 신영복 선생의 글 중에 바다는 세상의 모든 물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바다는 세상에서 가장 큰 물이지만 동시에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물이라고 했습니다. 사다리의 가장 높은 곳에서 벽화를 그리는 사람은 자신이 그린 그림이 똑바른지 알 수 없지만 가장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은 그 그림을 정확히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무의 진정한 가치는 산꼭대기에 홀로 서 있을 때가 아니라 다른 나무와 더불어 숲을 이룰 때라고 했습니다. 이 짧은 글들 속에 정치의 진정한 의미 지도자의 참 모습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주인이었지만 육신을 입고 사람들 틈에 거했습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였지만 항상 하늘의 뜻을 살폈습니다. 예수님은 탁월한 스승이었지만 기꺼이 제자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을 혼자서 완벽히 처리할 수 있었지만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돌아섰지만 끝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악행에 보복할 수 있었지만 철저하게 용서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 없는 신이었지만 세상을 위해 참혹한 죽음을 견뎠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피곤했지만 사람들의 고통에 눈을 감은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자신의 역할을 말 대신 몸으로 실천했습니다. 호화로운 궁궐에서 산해진미로 배를 채우는 국왕이 가난한 백성들의 탄식을 들을 수 있다면 절대권력을 가진 독재자가 하늘의 뜻을 겸허히 물을 용기가 있다면 정권을 장악한 집단이 소외된 그룹에게 공존의 기회를 허락할 수 있다면 역전에 성공한 무리들이 보복의 칼날 대신 화해의 손길을 내밀 수 있다면 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이 승자의 깃발 대신 고난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면 권력의 정상에 오른 자들이 세상의 고통에 가슴으로 반응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정말 달라질 것입니다. 정치에 대한 환멸과 정치가들에 대한 욕설 대신 존경과 감탄의 탄성이 환희와 감사의 찬미가 세상을 채울 것입니다. 진정한 리더를 향해 “호산나”를 외치던 그 날의 감동이 재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가들에게도 예수님은 필요합니다. 꼭. 배덕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