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을 시작하며 종려주일입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며 부활절 일주일 전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열기에 휩싸였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인파들로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군중들의 함성으로 성 전체가 떠나갈 것 같았습니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벗고 종려나무 가지들을 꺾어 영웅이 걷는 길 위에 펼쳐 놓았습니다. 그 무리들 속에서 예수님은 어린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축제였습니다. 감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에 들어온 예수님은 환호성을 뒤로 한 채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 안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의 상을 뒤엎고 그들을 성전에서 거칠게 몰아냈습니다. 소위 말하는 ‘성전청결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분개하셨고 “이 성전을 허물고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결과 군중들의 폭발적 환호성은 싸늘한 침묵으로 돌변했고 영웅을 향한 열정적 사랑은 광포한 증오로 뒤바뀌었습니다. 극적인 반전입니다. 무서운 역전입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을 맞이하는 군중들의 생각과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군중들은 자신들의 질병 가난 고독을 치유하는 예수님의 행적에 열광했습니다. 자신들의 현실적 필요를 즉각적으로 해결해주는 그의 “기적의 손”에 흥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했던 것은 바로 거기까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문제의 근원 뒤틀린 현실의 본질 타락한 세상의 구조적 결함을 직접 공격하는 순간 그들은 예수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위험하다고 불온하다고 과격하다고 말입니다. 한계입니다. 슬픔입니다. 그러나 성전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로 추락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맘몬(돈의 신)의 전당으로 타락하는 비극을 묵과한다면 그는 결코 ‘진정한 메시아’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목적이 타락한 성전을 재건하고 변질된 종교를 개혁함으로써 허물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새우는 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고난주간은 “성령의 전”인 우리 각자의 몸을 청소하고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축복의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소망입니다. 비전입니다. 배덕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