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 편견의 벽을… 인간은 유한합니다.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우사인 볼트는 저보다 엄청나게 빠릅니다. 하지만 볼트도 치타보다 빨리 달리지 못합니다. 박태환 선수는 저보다 수영을 훨씬 잘 합니다. 하지만 그런 박 선수도 돌고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김용옥 교수는 저보다 똑똑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유식한 김 교수도 네이버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분명히 저는 성경의 무두셀라만큼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두셀라도 죽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한계들이며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한계인 것입니다. 육체적 한계만큼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편견’입니다. 편견에도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에게 다양한 종류의 편견이 있고 그 편견을 극복하는 것은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사실 대부분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육체적 한계와 달리 편견은 위험합니다. 육체적 한계는 인간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더욱 창의적이 되고 협력을 추구합니다. 따라서 육체적 한계 때문에 인간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합니다. 하지만 편견은 삶 속에 갈등과 긴장을 초래하지요. 때로는 폭력과 죽음을 야기하는 치명적 독소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편견을 묵인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뀀리사회에서 편견은 대단히 다양한 영역에서 복잡한 이유로 존재합니다. 먼저 인종적·지역적 편견이 있습니다. 흑인에 대한 백인의 편견이 대표적입니다. 정치적 편견도 있습니다. 종북좌파를 향한 사회적 편견은 요지부동입니다. 경제적 편견도 존재합니다. 가진 자와 없는 자 사이의 적대감은 치유불능입니다. 성적 편견은 어떻습니까? 여성에 대한 편견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는 넘을 수 없는 산입니다. 종교적 편견도 심각합니다. 타종교에 대한 증오 신학적 차이로 인한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편견들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다양한 방식과 농도로 결합되어 더욱 강화되고 복잡해집니다. 결국 편견에 붙들려 우리는 계속 증오하고 혐오하며 죽이면서 살아갑니다. 가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유대인이고 다른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한쪽은 식민지주민이고 다른 쪽은 점령군장교입니다.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종교적으로 인종적으로 정치적으로 같은 하늘아래 살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성령께서 개입하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성령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베드로와 고넬료 사이에 존재하던 철옹성 같은 편견이 허물어졌습니다. 성령에 붙들린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이 편견의 시대에 우리가 성령을 앙망하는 절박한 이유입니다. 배덕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