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이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는 삶 자체를 고통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나름의 한숨과 고민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겐 늘 돈이 문제입니다. 살기 위해 꼭 필요한 돈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처럼 사람들이 건강에 집착하던 시절도 없었던 듯합니다. 그것은 질병에 대한 부담과 공포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겠지요. 사람 때문에 사는 것이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정작 가장 무서운 원수가 될 때 삶은 정말 지옥이 됩니다. 요즘처럼 삶 자체가 무한경쟁의 정글이 된 시대에 살아남는 것 자체가 기적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만큼 사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렇게 가혹한 현실에서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돈 질병 사람 그리고 생존에 대한 극진한 부담 속에 우리가 오늘도 하루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힘과 이유 중 하나가 “감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의 현실 속에서 순간순간 체험하는 작은 감동이 사막 같은 삶의 한 복판에 희망과 용기의 오아시스를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감동은 언제나 사람을 통해 찾아옵니다. 힘들 때 말 없이 손을 잡아 주고 고통스러울 때 넋두리를 들어주고 막막할 때 슬며시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주고 용기를 잃었을 때 힘껏 파이팅을 외쳐주고 살기 싫어졌을 때 가만히 안아주고 외로움에 서러울 때 곁에 있어주고 마음이 추울 때 따뜻한 커피를 타주고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눈물로 기도해 주는 “사람” 때문에 우리는 감동 속에 계속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니 제 주변에는 늘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외롭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는데 자꾸만 저를 감동시키는 사람들이 곁에 많이 있더군요. 저의 부족한 설교에 큰 소리로 “아멘”하는 성도들 때문에 힘을 얻습니다. 밝은 미소로 저의 손을 잡아주는 분들 때문에 용기가 납니다. 함께 놀아주지도 못하는 아빠를 꼭 안아주는 아이들 때문에 살 맛이 납니다. 고생만 시키는 남편임에도 한결 같이 신뢰해 주는 아내 때문에 삶이 감사가 됩니다. 친구의 도리를 다하지 못함에도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친구야!”라고 불러주는 놈들 때문에 그래도 웃게 됩니다. 터무니 없는 기도에도 늘 넉넉한 축복으로 응답해주시는 예수님 때문에 저는 오늘도 신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히 사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 곁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선물입니다. 사람 때문에 받은 상처가 사람 때문에 받은 감동으로 치유됩니다. 살기 때문에 겪는 고통이 감동으로 극복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우리에게 “사람의 몸”으로 보내신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살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