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지칭하는 표현들이 다양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구주와 죄인. 목자와 양, 신랑과 신부, 아버지와 아들 등. 이런 표현들 모두 양자 간의 본질적 차이와 친밀함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이런 여러 표현들 중, 개인적으로 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예수께서 제자들의 부탁에 따라 기도를 가르치실 때, 기도의 첫마디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시작하도록 하신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달리, 누가복음 버전의 주기도문은 일체의 수식어 없이“아버지”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유학 중에, 한인학생모임에서 한 목사님이“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모임이 끝났을 때, 여성신학을 전공하는 한 여 학생이 그 목사님께 달려와서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항의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 아버지라니요? 배운 분이 그렇게 무식하게 기도하시면 어떡합니까? 영이신 하나님에게 성적 정체성이 있습니까? 그런 가부장적 사고를 빨리 극복하셔야 합니다.”그런 뜻밖의 공격에, 목사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빨개지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이 여성의 정당한 권리를 사회와 교회 안에서 부당하게 억압하는 신학적 근거로 남용되었다면, 그것은 교회가 반성하고 극복해야 할 오류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성경과 역사에서 진정으로 여성을 존중했던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을 때, 또 우리에게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도록 하셨을 때, 그는 결코 성적 억압을 전제하거나 목적하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본질적 차이에 근거한 권위와 인격적 관계에 근거한 친밀함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아버지”였기에, 당대의 익숙한 여러 표현들 중에 “아버지”를 하나님의 호칭으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요?
물론,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 간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고 돈독했습니다. 두 분은 늘 동행했고, 대화했으며, 뜻이 통했습니다. 동시에, 그 아버지는 예수의 뜻과 달리 그에게 십자가를 지게 했고,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동안에는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예수와 하나님 간의 관계는 깨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저는 “아버지”라는 호칭 속에 담긴 “권위와 친밀함”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어도 순종할 수 있었고, 동시에,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신뢰했기 때문에, 고통을 참으며 끝까지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뜻도 그 쯤 어디에 있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배덕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