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2011-02-19 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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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서 끝내야 할 여러 일들이 있었습니다. 돌봐야 할 교회와 가족들도 있었고요. 거기다 명절까지 끼어있었지요. 그래서 2주간이나 한국을 떠나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은퇴선교사님들에 대한 다큐 제작을 위해 미국으로 취재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교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함께 가실 수 있나요?”라는 PD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예정된 운명처럼 저는 그렇게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감정으로 말입니다. 사실 출발하기 몇 주 전부터 모든 상황이 불안했습니다. PD의 부탁으로 제가 미국 쪽과 접촉하여 인터뷰 스케줄을 잡아야 했으나 미국과의 접촉 자체가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여러 선교사들께서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일부는 너무 연로하여 치매증상을 보이신다고 했습니다. 이 분야에 정통한 학자는 우리들의 프로젝트가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으로 수 십 통의 이메일을 보내고 밤낮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불안한 시간이 계속 지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극적으로 한 분씩 통화가 되고 스케줄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극적”이란 말이 무엇인지 실감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런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왔고 또 한 주간이 지났습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어려움 뒤에는 기쁨이 찾아온다는 말은 진리인 것 같습니다. 어려움 속에 미국에 왔지만 그리고 살인적인 일정 속에 몸은 피곤하지만 모든 인터뷰는 은혜와 감동으로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인터뷰한 선교사는 90세가 넘은 할머니였습니다. 남편과 함께 1954년부터 40년 간 한국에서 사역했던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외롭게 양로원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혼자서 걷기 힘들 정도로 육신은 약해졌고 기억마저 희미했으나 한국에서 보낸 지난 세월들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헤어질 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들의 손을 하나씩 잡고 놓을 줄 몰랐습니다.   선교사님들이 한국에서 한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분들이 한국교회를 위해 행한 수고도 엄청납니다. 그분들이 남긴 유산과 업적도 대단합니다. 하지만 모든 선교사들은 지극히 겸손하게 자신의 선교활동을 평가했습니다. 한 선교사님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한국에 갔던 것입니다. 한국과 한국인들을 사랑하러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인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꼭 다시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던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저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터뷰를 끝내며 다짐했습니다. “주님 저도 당신의 심부름꾼이 되겠습니다. 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                                                                                                                        배덕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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