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님께서 미국 유학시절 결혼식 주례를 부탁 받았습니다. 한국인 신부와 미국인 신랑 간의 소위 ‘국제결혼’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예전의 방식대로 주례사를 이어갔습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바로 그 때 미국인 신랑이 오른 손을 앞으로 뻗으며 주례사를 중단시키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That’s too long!”(그건 너무 길어요!). 서양인이었던 그에게 결혼생활을 그토록 오래하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나 봅니다. 그 순간 목사님은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요!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삶에서 정말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학교를 다니며 꽤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습니다. 평생 우정을 나눌 것 같았던 친구들 중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잊은 이들이 꽤 많습니다. 오랫동안 왕래했던 친척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역 때문에 몇 교회를 거치면서 많은 교우들과 은혜와 사랑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헤어지면서 꼭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이후 생사조차 모르는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모두가 소중한 인연이었지만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한 관계들입니다. 얼마 전 흥미로운 토크쇼를 보았습니다. 유명한 배우가 자신의 곡절 많은 삶을 나누었습니다. 한때 불량했던 그는 우연히 나간 교회에서 극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했고 후에는 신학대학에까지 진학했습니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에 가담했던 그는 시국사범으로 감옥에도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한때 목회자를 꿈꾸었던 그가 그 꿈을 포기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마저 버렸다는 말에는 저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강력한 체험 속에 오랫동안 지녀왔던 신앙을 어떻게 버릴 수 있었을까요? 덧없는 인간관계처럼 우리의 신앙조차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지는 모습에 저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욥기를 읽었습니다. 잘 알려졌듯이 당대의 의인이요 거부였던 욥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부당한 재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었습니다. 가까운 벗들이 달려와 그의 죄를 책망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와 환란 속에서 그가 한 고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다.” 극심한 위기 속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그의 모습이 정말 귀합니다. 점점 더 사람 간의 정이 약해지고 관계의 소중함이 망각되는 때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만은 욥의 전통을 이어가길 바랍니다. 배덕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