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시간에 ‘삭게오와 주님의 만남’ 부분을 함께 읽었습니다. 수 없이 읽었던 말씀인데 이번에는 매우 신선한 느낌을 주며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주님을 보고 싶어 “뽕나무”에 올랐던 삭게오는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돈을 위해 민족마저 버렸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돈을 버린 것입니다. 비열한 세리가 선량한 이웃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무엇이 그런 변화를 가능케 했을까요? 우리는 삭게오의 변화 과정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네 가지 행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삭게오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낯선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여간 어색하고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반면 진정한 인간관계는 눈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부터 시작되지요. 마틴 부버의 표현대로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 “나와 당신”의 관계로 발전합니다. 둘째 주님은 삭게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상대의 이름을 불러줄 때 “남”이 “님”으로 변모됩니다. 시인 김춘수의 말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됩니다. 셋째 주님은 삭게오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허락 받지 않은 손님은 “불청객”이요 허락하지 않은 방문은 “가택침입”입니다. 따라서 집을 개방하는 것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끝으로 주님은 삭게오와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을 “식구”라고 명명합니다. 함께 식탁에 앉음으로써 우리는 생명을 공유하는 운명적 관계가 된 것입니다. 물론 식구는 가족의 다른 말이지요. 결국 주님은 철저히 남이었던 삭게오의 눈을 바라보고 이름을 부르고 집을 방문하고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삭게오를 가족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의 그 정(情)이 돌 같은 삭게오의 마음을 녹이고 닫혔던 삶의 공간을 개방하고 흉물스런 금고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제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바로 삭게오입니다. 돈을 위해 양심도 버렸지만 주님을 보기 위해 매주 “뽕나무”에 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음에도 끊임없이 둘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불안한 도박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벗이 되어 그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 공간을 공유하며 함께 식사하는 관계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천국의 문턱에 닿을 것입니다. 행복한 여정입니다. 배덕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