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젊은 교수가 가족뿐인 교회 개척한 사연

2010년 ( 벌써 5년 전이네요) 뉴스파워에 실렸던 배목사님의 인터뷰입니다. 

이미 읽으신 분들도 많겠지만 

목사님의 목회 철학과 초기 주사랑교회 모습을 잘 알 수 있는 글이라 옮겨봅니다. 

 

근본주의 극복할 대안, 직접 찾아 나서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고, 역사적으로도 명확하게 정의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배 목사는 근본주의의 특성을 통해 이해를 돕는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지닌 근본주의는 과도한 배타성, 기복, 성장, 대형, 일등이라는 가치를 쫓는 데서 발견된다. 최근 여론을 달구었던 ‘봉은사 땅 밟기’ 사건도 기독교 근본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어쨌든 이런 복잡한 역사를 공부하던 사람이 3년 전 지방으로 내려가 목회를 결심했다. 몸소 그 대안을 찾아내겠다는 굳은 의지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돈이나 사람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열심히 한 영혼 한 영혼 섬기면 부흥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라는 것을, 아니 교회가 잘 돌아갈 거라는 것을 제가 대안으로 보여줄 수 있게 해주세요.’

아무런 경험 없이 뛰어든 목회의 현장. 첫 교인은 식구들이었다. 총 5명. 교회에는 아무도 올 것 같지가 않았다. 교회의 입지 조건도 최악이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지하에다, 대전에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교인들과의 소소한 일상들이 희망


목회를 시작했지만 막상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신학생들에게 ‘개척하라’고 가르쳐온 그였지만, 정작 본인은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실감했다. 

“학교에서 풀타임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니까 전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그런데 지금 3년이 지났는데, 교인이 33명이 왔어요. 이 중에 제가 전도한 사람이 한명도 없어요. 또 나를 알아서 온 사람도 없어요. 나 때문에 온 사람 아무도 없어요. 진짜로 하나님이 한명 한명 보내 주신 거예요.”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렀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알고 보니 그 시간동안 교인들과 함께 지냈던 소소한 일상들이 바로 근본주의를 극복하는 첫 걸음이었다. 생존이 불투명한 개척교회가 경험한 평범한 이야기 속에, 한국교회 성도들 전체가 함께 읽어도 좋을 하나님의 은혜와 희망이 담겨 있었다. 
 
“저희 교회는 미자립교회입니다. 그러나 한 번도 돈 때문에 걱정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헌금을 사람들이 거의 안 내요. 돈 낼 사람들이 없거든요. 제가 제일 많이 내요. 다행히 선후배들, 개인 후원자들이 후원금을 보내주시거든요. 이전 목사님이 월세를 4년 동안 한 번도 못 냈거든요. 그 정도로 어려운 가운데에서, 사람도 돈도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거죠.”
 
민주적인 교회 만들기


배 목사가 목회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민주적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개신교 근본주의의 특징 중에 하나가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모습. 목자가 다 끌고 가고, 평신도는 끌려가는 그런 교회로는 희망이 없다고 봤다. 

“저는 우리 교회의 주인은 모두라고 생각해요. 우리 교회는 나도 한 표, 어린 아이들도 한 표라고 생각해요. 이런 의미에서 저희는 월례회를 해요. 한 달에 한 번씩 모든 것을 같이 결정하고 성찬식도 아이들이 다함께 참여해요. 개방성찬을 하죠. 저는 목회자로서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이 제 역할이고, 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모두가 같이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모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전부다 권리와 책임이 같이 가야 한다는 게 제일 중요한 원칙이었어요.”  


교회와 관련된 모든 것은 절대 다수결에 의해서 간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신자들이 원하면 절대로 강요하지 않고 따른다. 최근에는 ‘교회를 옮기자’는 안건을 투표에 올렸다. 교회 이전은 배 목사 자신이 추진하던 것으로, 이와 관련해 집회도 많이 했기 때문에 문제없이 통과될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6대 7. 올해 가지 말고 내년에 가자는 입장이 더 많았다. 그는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하면서 목사의 말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지 않는 민주적인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고 밝혔다. 

 

한 달에 한권씩 책도 함께 읽는다. 처음에는 다들 힘들어 했다. 몇 명만 참여하던 이 모임은 더디지만 꾸준히 계속되었고, 지금은 교인의 90% 이상이 책을 읽고 있다. 얼마 전에는 본회퍼 목사의 전기를 읽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긴 분량의 책으로, 독서 호흡이 짧았던 분들도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됐다. 독서가 익숙하지 않았던 평범한 성도들이 지금은 ‘빼앗긴 대지의 꿈’과 같은 어려운 책들도 다 소화해 낸다. 

 

“큰 교회 다니면서 이런 거에 익숙하지 않았던 분들인데, 교회에서 경건서적, 사회 서적 등을 돌아가면서 읽으면서 참 많이 깨이고 성숙해지는 것 같아요. 저를 비롯한 교인들이 눈이 트이고 시야가 넓어지고 있어요.”
 
세상을 바꾸는 도전


이러한 교인들의 노력과 참여는 지역사회를 돕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1년에 두 차례 구제헌금을 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때 모인 30만원으로 쌀 110킬로그램을 사서 동사무소에 갖다 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사랑교회가 그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교회였다.

“오히려 우리 교회가 제일 가난하더라고요. 아무리 어려워도 구제헌금으로 30만원은 낼 수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대전에 있는 2,800개 교회가 일 년에 30만원씩 헌금해서 그것으로 쌀을 사면 얼마나 많이 모이겠어요.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대전에서는 밥을 굶는 사람이 없어지는 거죠.”
 

배 목사는 최근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와 ‘세상을 바꾸는 도전’이라는 두 책을 거의 동시에 펴냈다. 앞의 책이 문제의 진단이었다면, 뒤의 책에는 교회개척 후 3년간의 목회경험을 적었다. 진단과 대안을 동시에 펴낸 샘이다.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대안을 모색했기에,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희망적이다. 

 

※ 다음은 인터뷰 중 일부

 
- 교인은 얼마나 되세요?
지금, 재적이 33명인데요. 애들 10명 어른 20명 정도예요. 처음에 비하면 엄청나게 부흥했죠. 우리 식구로 시작을 했는데, 5명에서 시작했으니까 거의 6배 성장했네요.(웃음)
 
- 교회 역사를 가르치는 신학자에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언제 제일 그런 걸 느끼세요? 아 내가 목사구나 하는 걸요. 
설교할 때요. 그리고 새벽예배 드릴 때요. 제일 느낄 때는 새벽예배 드릴 때예요. 왜냐하면 전에는 공부를 하니깐 새벽에 2시 넘어서 자고, 이러니깐 4시에 못 일어나죠. 목산데... 그래서 저한테 굉장히 콤플렉스였어요. 목산데 새벽예배도 못 나간다라는 거에 대해서... 그런데 요즘에 개척하고서 새벽예배를 드리니깐. 새벽에 설교하고 기도하고 이러니깐 참 목사구나 하는 걸 많이 느껴요.

제일 중요한 것은 교회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는 거예요. 개척교회 하면서, 그 전에는 대형교회 청년부 파트타임 목사로 다녔지. 그러면서 내가 청년부 애들이 내 양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솔직히 전 이 교회에 월급쟁이라고 생각하고 다녔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개척을 하니깐, 선배들이 말했던 ‘개척교회 하게 되면 한 영혼이 중요하다’ 이 말이 정말 뭔지 알게 됐어요. 

주일에 예배를 드리러 오면, 이제 교회 와서 예배 시작 전에 기도를 하잖아요. 그 때 우리 교회가 지하1층에 있는데, 내 귀가 1층으로 올라가서 입구에 가있어요. 누구 오나 하고요. (웃음)

그 다음에, 한국교회가 실질적으로 이런 교회가 60%가 넘거든요. 여기에 있는 목사님들 성도들 이런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정말 피부로 생기게 되고, 그게 이제 결국 저한테 학교에서 가르치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많이 달라지던가요?

제가 그동안 생각했던, 여러 가지 생각이나 가르침들이 그동안은 구름 위를 걸어다니고 있었어요. 가난한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만 오거든요. 이 사람들의 삶을... 제가 그동안 목회를 안했던 이유가요. 사실 전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요. 그게 힘들거든요. 전 저 하나 감당하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하고 끌어안고 가는 게 저한테 정말 힘들어서 안했거든요. 그런데 개척교회는 정말 그런 사람들만 와요. 
 
가스가 끊겨서 우리교회에서 부르스타로 밥을 해먹는 사람도 있고, 집 다 날리고 아파트도 다 날리고 집에 tv도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대형교회에서는 본적이 없는데, 개척하고서는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되고 얘기 듣게 되고, 그런데,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결국 기도할 수밖에 없죠. 또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 역사도 하시고, 또 이 사람들이 문제가 해결 될 때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그런 감동. 또 내가 왜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지. 그리고 저 사람들이 저에게 주는 것. 그러니까 저로 하여금 눈을 구름 위에서 땅으로 내려오게 하는데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쳤죠. 

내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깨지고, 또 한계를 보고, 또 그 분 앞에서 회복하고... 이러면서 때려치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어요. 사실 제가 이걸 굳이 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제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대형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3년 하면서 ‘아 진짜 내가 목사가 되어가고 있구나. 목사가 됐다가 아니라 되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전 아직 목사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목사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죠. 
 
- 참 많이 바뀐 거네요. 시야라든가 세계관의 전환이라고 해도 될까요?
많이 바뀐 거죠. 굉장히 바뀐 거죠. 제가 3년 전에 목회를 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 그것 때문이예요. 나한테 그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면은 두 가지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제가 가르치는 학교가 조그만 교단에 속한 오순절 계열의 신학교예요. 그니깐 우리학교는 특히 나이 먹은 사람들이 많이 와요. 정식으로 시험 봐서 들어가기 힘든 분들이 우리 학교는 면접으로 뽑으니깐 물론 인가난 학교지만.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나이 먹고 소명을 받아서 오니깐, 보통 이 분들이 개척을 해요. 그래서 나는 이 분들에게 교회 개척하라고 해놓고 전 해본 적이 없잖아요. 아 이건 결격사유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군대도 안다녀온 사람이 육군사관학교 교관이 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군대 다녀오는 심정으로 목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제가 현대기독교아카데미를 가든, 학회를 가든. 제가 한국 교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거든요. 제가 이제 막 비판을 하면 플로어에서 질문이 뭐냐면,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건 목회를 안 해봐서 그렇다는 거예요. 한국 교회 목사들이 괜히 타락하고 돈 밝히고 그런 게 아니라, 개척교회 신자들도 없는 상황에서 그 상황에서 한국 교회 민주화니 평화운동이니 그런 게 가능하겠냐 이거죠. 제가 목회를 안 해봤기 때문에, 나이브한 소리 유토피아적인 소리를 한다 이말 하는 거죠.

그런면에서, 내가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 말하는 것도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저런 말을 당당하게 하려면 일단 제가 목회를 잘하고 말고를 떠나서 일단 목회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죠.

세 번째는 제일 중요한 데요. 내가 교회 교인들에게 비판을 했는데요. 사람들이 또 말하는 것이 ‘그렇게 안하면, 목회가 안 된다’ 이렇게 얘기를 했거든요. 그러니깐 사람들이 목회하러 나가면 여러 군데 워크숍 다니면서 여러 가지 테크닉을 배워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교회를 돌리잖아요. 그런데 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성령충만함이 중요하다 이 것만으로도 목회가 된다. 교과서는 이렇게 가르쳤는데, 현장에서는 전혀 이렇게 안 되고 있다는 얘기잖아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돈이나 사람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열심히 한 영혼 한 영혼 섬기면 부흥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라는 걸, 아니 교회가 잘 돌아갈 거라는 걸 내가 대안으로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했죠. 그래야 절 보는 신학생들이 아 저렇게 하면 되는 구나 할 것 아니예요. 여러 프로그램 안 쫒아다녀도, 하나님 믿음으로 된다는 걸 볼 수 있을 거 아니예요. 

뭐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죠. 한국 교회, 제자들, 신학생들이 보고 있다고...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을 대신해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날 도와줘야 한다고 ... 그런 기도를 제일 많이 해요. 
 
- 지금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굉장히 불안전 하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꿈꾸던 만큼은 아니지만, 저는 우리 교회 아무도 안 올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지하에 있죠. 심지어 아무도 없죠. 게다가 전 대전사람이 아니예요. 학교 때문에 대전에 가서 10개월 지났을 때, 개척을 한 거거든요. 그니깐 사람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죠. 또 우리 학교는 조그마한 학교지.... 그래서 아무도 안 올거라는 생각이 들죠. 그리고 전도도 못하죠. 저는 학교 풀타임으로 있으니깐 나가서 전도지 돌릴 상황이 아닌거죠. 그런데 지금 3년이 지났는데, 30명이 온거예요. 이 중에 제가 전도한 사람이 한명도 없어요. 또 나를 알아서 온 사람도 없어요. 나 때문에 온 사람 아무도 없어요. 진짜로 하나님이 한명 한명 보내 주신 거예요. 

3년동안 지내는데, 저희가 미자립교회인데요. 한번도 돈 때문에 걱정을 해본 적이 없어요. 헌금을 사람들이 거의 안내요. 하하 돈낼 사람들이 없거든요. 제가 제일 많이 내요. 다행히 선후배들, 개인 후원자들 이런 분들이 후원금을 보내주시거든요. 전에 목사님이 월세를 4년동안 한번도 못 냈거든요. 그정도로 어려운 가운데에서 사람도 돈도 하나님이 보내주시는거죠. 감사한거죠. ^^ 3년동안 예배 다 했고, 새벽예배 금요예배 다 했고. 우리 가운데에서 또 신학자도 나오고요. 참 이정도면 부흥했다고 생각해요. 
 
- 책에서 목회자로서의 ‘존재’의 기쁨을 누려야 한다는 말을 참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목회철학이나 교회 운영은 어떻게 되나요? 
제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민주적인 교회를 세우는 건데요. 목회자의 권위를 내려놓는 그런 교회요. 목자가 다 끌고가고, 평신도는 끌려가는 그런 교회 말고요. 저는 우리 교회의 주인은 모두라고 생각해요. 우리 교회는 나도 한표, 애들도 한표다 이렇게 생각해요. 이런 의미에서 저희는 월례회를 해요. 한달에 한번씩 모든 것을 같이 결정하고 성찬식도 아이들도 다 참여해요. 개방성찬을 하죠. 저는 목회자로서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이 제 역할이고 교회를 운영하고 그런 것은 모두가 같이 역할 분담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돈도 같이 내고, 헌신도 같이해야 하고 그런거죠. 모든 성도들 한사람 한사람 전부다 권리와 책임이 같이 가야 한다 이게 제일 중요한 것이었어요. 이렇게 민주적으로 간다. 모든 것은 절대 다수결에 의해서 간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신자들이 원하면 절대로 강요하지 않고 따른다. 이런 거죠. 

그 다음으로 꼭 하고 싶은데, 지금은 제대로 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뭐냐면요. 지역교회가 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 동네에 꼭 필요한 교회, 그 동네의 환경에 적합한 교회. 동네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 우리 교회가 동네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 이런건데요. 제가 제일 크게 꾼 꿈이 뭐였냐면요. 동사무소와 파출소와 우리 교회가 협력해서 밤 12시에도 여자들이 그냥 걸어다닐 수 있는 동네를 만들자. 이게 제가 꿈꾸는 중요한 일이예요.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 동네에서는 단 한명도 밥을 굶는 사람이 없게 만들자 이거예요.  

 

- 그런데도 구제헌금을 마련해서, 지역사회를 돕고 있다구요.

제가 개척한지 첫 해에, 우리 교인들 10명이 안되었을 때부터, 저희가 일년에 두 번 구제헌금을 해요. 이렇게 구제헌금을 했을 때, 30만원이 나왔어요. 이걸로 쌀을 샀더니, 110킬로가 나오더라고요. 110킬로는 동네 동사무소에 갔다줬어요. 근데, 저희 동네가 대전에서 제일 잘 사는 교회더라고요. 오히려 우리 교회가 제일 가난하더라고요.(웃음) 
어째든 무슨 생각을 했냐면요. 대전에 2800개 교회가 있어요. 우리 교회가 제일 가난한 교회중에 하나겠죠. 그럼에도 우리 교회가 일년에 두 번 30만원씩 드릴 수 있어요. 아무리 어려워도. 그렇게 110킬로가 모아지는 건데요. 근데 대전에 2800개 교회가 일년에 30만원씩만 헌금을 해서 쌀을 사면 모아지는 쌀이 얼마나 되겠어요. ^^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대전에서는 밥을 굶는 사람이 없어지는거죠. 이런 운동을 하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저희 교회가 지역교회들과 연합을 해서 이런 운동을 벌이고 싶어요. 
 
- 교회 성장에 대해서는 어떤 관점을 갖고 계신가요?
우리 교회는 100명 이상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역자마다 역량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제가 주일에 모여서 우리 교인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한번 씩 중보기도를 해줄 수 있는 맥시멈, 그리고 교인들이 아파서 심방을 요청했을 때, 달려가서 케어할 수 있는 양의 맥시멈이 어른 50명 아이 50명이라고 생각해요. 
 
가정으로 따지면 25가정이겠죠. 저는 이정도면 교회가 자립할 수 있다고 봐요. 적지만, 목사님께 분명 사례비를 줄 수 있을 거라고 보고요. 그 다음부터 100명이 넘게 되면 50명 단위로 짤라서 지교회가 아닌 자매교회, 네트워크, 같은 뜻을 공유하는 목사들이 모이는 거죠. 이 교회들에서 우리가 신자들을 키워서 신학교를 보내고, 신학생들을 또한 자기 돈으로 공부하지 않고 교회가 공부할 수 있게 해주는 거죠. 애는 정말 신학교를 보냈으면 좋겠다 하는 아이를 추천해서 m.div 장학금을 교회가 대고, 그 아이가 공부를 마치면 우리 교회가 성장한 만큼 성도를 짤라내서 이 친구를 통해서 감당하게 하는 거죠. 
 
이렇게 작은 교회 운동을 했으면 해요. 만약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대규모의 일을 할 때에는 이런 교회들이 공동으로 협력해서 선교사도 보내고 하는 등으로 일을 하는 거죠. 25가정 정도의 교회. 근데 또 너무 적으면 목사님이 먹고 살기 힘드니깐. 우리 교회의 생각이예요. 우리 교회는 이렇게 꿈을 꾸죠. 
 
- 교수님 목회를 하시면서, 목사하기를 잘했다 뿌듯했던 적이 있다면요?
참 많은 걸 느꼈고, 뿌듯했던 적도 많은데요. 그 중에. 한 청년이 우연히 오게 됐어요. 우리 교회에, 그 친구가 대형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요. 그 교회에서 실망을 해서 교회를 찾고 있던 중이었죠. 그런데 이때 이 친구가 삶이 코너에 몰린 상황이었거든요. 유능한 친군데, 중국에 명문 대학에서 유학도 하고, 중간에 사업을 했는데, 이게 망한 거예요. 그러다보니깐, 학교 졸업도 못하고 빚더미에 앉고 신용불량자도 되고, 직업도 갖기 힘들고, 나이는 30대 중반이고 그런 상황이었죠. 
 
사실은 이 친구가 어릴 때 꿈이 선교사였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에서 목회자들에게 많은 실망을 한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신학교를 안가겠다 마음을 먹은 거죠. 목회자, 신학교에 대한 편견과 실망이 많았던 거죠. 그런 사연이 있는 친구였는데, 그 때 교회 상황이 신자가 거의 없었고 새벽예배는 사실 아내랑 둘이서 드리고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친구가 이후로 새벽예배에 같이 나오게 됐죠. 그러면서 굉장히 많은 시간을 거의 1년 동안을 그 친구와 새벽예배를 드리게 된거죠. 
 
그러다 보니깐 새벽예배가 예배가 아니라 신학 토론회 시간이 된 거에요. 기도를 한 뒤에 이 친구가 가진 온갖 질문들을 쏟아 놓고, 저는 이제 그 친구 질문에 대해 낑낑 대면서 얘기하고 같이 기도하고 또 기도 끝나고 나면 국밥집으로 옮겨서 2시간동안 더 얘기하고 이렇게 이 친구랑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된 거죠. 

그리고 난 다음에, 이 친구가 1년이 지난 다음에 신학교를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학교 입학을 했는데요. 그러면서도 그 와중에 결혼도 하고 집에서 반대와 어려움이 많았는데 말이죠. 결국에는 이 친구가 다 겪어내고 또 무엇보다 목회자 신학교 하나님에 대한 편견 이런 것들이 많이 없어진 거였죠. 문제들도 상당부분 해결이 되고... 또 우리 교회 많은 신자들이 이 친구를 통해서 오게 되었죠.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이 이런데 쓰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부흥강사도 아니고 전문적인 목회자도 아니고, 그냥 고민이 많은 신학잔데 나 같은 사람이 목회현장에 가면 어디에 쓰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고민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이 친구를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필요한 일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 친구를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죠. 또 이 친구도 저를 통해서 자기가 가야할 길을 가게 된 거죠. 이때 저는 굉장히 기뻤어요.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 친구도 자기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거죠. 대형교회 같았으면 이러지 못했겠죠. 또 제가 보수적이고 권위적이었으면 그러지 못했겠죠. 
 
- 교회 안에서 교인들과 의견이나 그런 것들이 잘 맞나요? 
우리는 한 달에 한권씩 책을 읽어요.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교수님들을 초빙해서 특강을 듣고요. 교회에도 책상이에요. 이런 게 전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에요. 평생 거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 대부분이고요. 우리 교회 와서 처음으로 책을 읽어본 사람이 되게 많아요.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어했죠. 처음에는 그래서 몇 명만 따라왔는데, 지금은 90%가 독서에 참여를 해요. 얼마 전에는 본회퍼 전기를 600페이지를 다 읽었어요. 

이런 교육과 과정을 겪으면서, 신자들이 굉장히 민주적인 교회에 익숙해진 거예요. 이번에 우리가 교회를 이전하자라고 제가 목표를 세우고 기도를 했어요. 근데, 10월에 투표를 했는데, 가지 말자고 6:7로 결과가 나온 거예요. 내가 막 집회도 하고 그랬는데 말이죠. 올해 가지 말고 내년에 가자는 거죠.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하면서, 이게 원칙이니깐, 결국 안가기로 했어요. 민주적인 교회로 가고 있다는 것이 참 좋기는 한데, 답답할 때도 많이 있네요. 

대형교회 다니면서 이런 거에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들인데, 하물며 사회의식이라던가 역사의식 같은 것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는데, 교회에서 책들을 경건서적, 사회 서적 등을 돌아가면서 읽으면서 그리고 교회의 민주적인 환경을 겪으면서 참 많이 깨고 성숙해지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는 장지글러의 <빼앗긴 대지의 꿈> 이런거요. 그런데 결국에는 다 소화해 내더라고요. 물론 천천히 하지만, 어려운 책인데 말이죠. 교회가 많이 눈이 뜨이고 시야가 넓어지고 그런 것 같아요. 감사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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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석진혁
저는 울산에 사는 평신도입니다. 46살이고 아내와 두아들이 있습니다. 신학에 대한 갈증때문에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연히  목사님께서 집필하신 책을 사서 읽고 최근에는  유투브 강의를 들으면서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사역하시는 교회가 주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힘내십시요^^
주사랑교회
관심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