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늙지만 믿음은 아이처럼
신학을 공부하는 세월은 정말 하나님을 알려는 몸부림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다 공개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발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신앙과 신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고 조언하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많이 안다, 똑똑하다, 날카롭다”는 소리를 칭찬으로 들었고, 그런 칭찬에 희열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 안에서 “하나님을 알려는 노력으로서 신학”에 대한 열정이 식고 있습니다. 적어도, 서구적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려는 노력, 즉 이성적 추론을 통한 “신인식”에 대해 흥미와 신뢰를 잃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을 보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적 이해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황당한 요구에 백성들은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믿음과 순종” 속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가 형성·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헬레니즘과 복음이 만난 이후, 서양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했습니다. 수많은 공의회, 신학논쟁, 그리고 엄청난 양의 신학서적들은 모두 이런 노력의 산물입니다. “이해와 설명” 속에 하나님은 추상적 존재가 되고, 우리의 신앙은 말만 무성해졌습니다. 많이 아는 학자, 똑똑한 신자, 날카로운 목회자는 많은데, 교회는 점점 재미없고 김빠진 곳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시트콤 하나를 보았습니다. 매우 명석한 의사가 친구들과 당구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구를 쳐본 적이 없던 그는 당구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명석한 그는 빠른 시간 내에 당구교본과 당구관련 잡지 등을 섭렵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당구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리고 당구시합 당일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 속에, 그는 멋진 자세로 큐를 잡고 공을 쳤습니다. 하지만 빗맞은 공은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가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는 한 번도 큐를 잡지 않은 채, 당구에 대한 책만 읽었던 것입니다.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연습은 전혀 하지 않은 것이지요. 결국, 그는 개망신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앎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지성이 있고, 읽어야 할 성경이 있는 한, 우리의 신학적 탐구는 멈출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지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며, 하나님에 대한 지적 인식이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적도 아닙니다. 굳이 키에르케고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며, 믿음은 순종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린아이 같이 반응할 때,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몸은 점점 늙지만, 믿음만은 어린아이처럼 되고 싶습니다. 유식한 신학자보다 소박한 신자로 살다 가고 싶습니다.
배덕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