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2012-10-21 하나님의 교회

주사랑교회 0 1,431

종종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믿는 것이 정말 잘 믿는 것인지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에 대해 말입니다. 신자로서 목사로서 차마 그럴 수 아니 그래선 안 되지만 당혹스럽게도 그럴 때가 정말 종종 있습니다. 학교와 교회에서 늘 성경과 신학에 대해 예수와 복음에 대해 진리와 구원에 대해 말하지만 정작 삶은 그런 것과 상관없을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오랫동안 성경을 읽었습니다. 수많은 신학/경건서적들을 읽고 꽤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다. 지금도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자주 기도합니다. 찬송도 부르고 헌금도 드립니다. 신자들과 다양한 모임을 갖고 여러 단체에도 참여합니다. 하지만 홀로 있을 때 깊은 고독과 공허감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함부로 행동하고 어려움에 직면할 때 지극히 인간적·현실적으로 반응합니다. 불쾌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을 때마다 많이 낯설기도 하면서 동시에 가슴이 뛰기도 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개인적 현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5:12).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5:16). 사도들을 통해 “기사와 이적”이 많이 일어났답니다.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려와 치유 받게 했답니다. 지금의 현실과 많이 달라 당혹스럽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결국 우리의 현실과 초대교회의 현실 간에 관찰되는 가장 뚜렷한 차이는 (1) “기사와 이적”의 유무 (2) “병든 자들을 데리고 옴”의 유무인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와 달리 오늘날에는 교회 안에서 기사와 이적을 체험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기사와 이적’이 교회 안에서도 자취를 감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든 사람을 교회에 데려올 수가 없습니다. 무능한 병원에 무조건 환자를 데려올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에서 병을 고쳤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처음 사랑을 경험했다는 간증도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존재의 이유 삶의 비전을 발견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교회가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고백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다른 병자들을 교회로 인도했고 상처 받은 영혼들에게 예수를 소개했으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왜 제 삶과 신앙이 무기력한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무기력한 교회 때문이었군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는 교회에서 열정적 신자들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무지한 일입니다. 하지만 무기력한 교회에도 성령의 불이 임한다면 그 무기력이 열정과 희열로 역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고 신자가 신자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를 꿈꾸며 함께 힘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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