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학교 복도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왜 울어?”라고 물었지요. “주사 맞는 것이 무서워.”위를 올려 보니 아이들이 주사를 맞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계속 계단에 앉아 흐느껴 울었습니다. 정말 무서워 떨고 있던 것입니다. 저도 주사 맞는 것이 싫습니다.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언제 바늘이 우리 살 속을 뚫고 들어올지 몰라 긴장되는 그 순간이 참 싫습니다. 물론 그 따끔한 고통도 싫고요. 그렇다고 주사 맞는 것이 무서워 계단에 앉아 우는 어른은 없습니다. 정상적으로 성장하면 극복할 수 있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시절에 군대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대학생들이 군대 갔다가 각종 이유와 사고로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던 때였습니다. 한번은 학교 담벼락에 붙은 대자보에 군에서 가혹행위를 당한 학생의 비참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학생운동을 했던 경력 때문에 군대에서 집요하고 조직적으로 학대를 당했고 결국 견디다 못해 탈영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운동권이 아니었음에도 군대에 가서 살아올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하고 안전한 군대 생활을 위해 온갖 방법을 모색했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수많은 젊은이들이 비슷한 공포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먹어도 쉽게 극복되지 않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두려움에 떨었던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목전에 둔 겟세마네에서 말입니다. 겟세마네 이전의 예수님은 언제나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권력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았고 폭풍우가 몰아쳐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마귀의 유혹도 군중의 위협도 육신의 피곤도 그를 위축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겟세마네에서 그분은 달랐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 잔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 자리에 홀로 설 수 없어 제자들을 데리고 동산에 올랐습니다.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그것도 땀이 피가 되도록 몸부림치며 절규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신경질까지 부렸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공포에 사로잡힌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철없는 아이처럼 두려움에 떨던 그 순간을 올해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기 전 인간의 가장 낮은 곳까지 떨어지는 경험을 주께서 체험하셨습니다. 저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처했던 순간 그래서 진정한 인간이 되신 순간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구세주가 되신 순간이 말구유나 십자가 위가 아닌 겟세마네였다고 생각합니다. 참 하나님이 자기를 비우고 죄인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마침내 참 인간이 되신 순간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샬롬”이라고 인사하신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부활 후에 진정한 샬롬을 체험하기 위해 이 고통의 일주일을 주님과 함께 보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겪는 두려움 하나님마저 피해갈 수 없었던 그 두려움이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의 부활과 함께 하늘의 평강으로 역전될 수 있도록 이 한 주간을 진정한 고난주간으로 보냅시다. 배덕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