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2012-03-18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주사랑교회 0 1,933
누가 농담처럼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하나님이 30여명 계신다.” 가까운 계룡산에도 몇 분이 계십니다. 참 요즘에는 하나님 어머니도 계시더군요. 여기저기에 도를 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구원을 위해 깨달음을 위해 명상하며 수련하며 예배하며 전도하는 이들이 넘칩니다. 그 무리들 중에 우리도 한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많은 것들 중에 어떤 것이 진짜일까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이 진짜 정통 진리라고 아우성인데 모두가 다 진짜일까요? 전부 짝퉁일까요? 아니면 그 중에 명품과 짝퉁이 뒤섞여 있는 걸까요? 우리는 신천지를 이단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우리가 이단이라네요. 순수하게 진리를 구하는 소박한 성도들에게 이런 현실은 혼란과 당혹일 뿐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요한이 타락한 군주 헤롯을 비판하고 옥에 갇혔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식 가운데 예수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 자신의 손으로 세례를 베풀었던 그 청년 말입니다.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그가 정녕 우리가 기다리던 그분일까? 그가 진정한 메시야일까? 확인을 위해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엉뚱했습니다. Yes도 No도 아니었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러면서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 역사에서 또 다른 오해와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의 앞부분에 주목했습니다. 예수의 신유능력이 그의 메시아적 특성이라고 주장하며 신유와 기적을 교회의 본질로 규정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예수가 메시아임의 핵심이라고 믿고 그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병자들에게 달려갔고 누구는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가난입니까? 필요한 분량이 부족한 일체의 사람 혹은 상황이 가난이 아닐까요? 건강을 잃은 사람은 건강한 사람에 비해 가난한 사람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처럼 목숨이 없는 사람도 가난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의사로 정의하고 의사는 건강한 사람이 아닌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가난한 자에 대한 섬김이 메시아의 핵심이며 결국 그를 따르는 교회의 본질이 된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부족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그래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메시아란 명백한 증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예수님의 모습 우리가 실천해야 할 주님의 교훈 우리 안에 실현해야 할 주님의 이상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덧붙인 마지막 경고가 마음에 걸립니다.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제대로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말씀이겠지요. 믿고자 한다면 따르고자 한다면 제대로 알고 믿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겠지요. 당연하지만 무서운 말씀입니다.                                                                                                                      배덕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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