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2011-09-25 삶으로 드리는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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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친구들과 제과점에서 빵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어린 의경이 들어왔습니다. 근무하는 파출소의 상관이 케이크를 하나 사오라고 했다며 한참 동안 케이크를 골랐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있던 1시간 동안 그 의경은 제과점과 파출소를 5차례나 왕복하며 케이크를 바꾸어갔습니다.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골라 갔지만 상관의 마음에 들지 않아 같은 행동을 한 시간째 반복했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와 제과점 직원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우리의 마음은 점점 난감해졌습니다.   그 의경의 경우처럼 누군가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 참으로 당혹스럽습니다. 심지어 참담하기조차 합니다. 만약 이런 일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벌어진다면 이것은 치명적인 재난입니다. 불행히도 이 재난의 역사가 교회사입니다. 인간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 애썼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때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오해로 점철된 기록이 교회사입니다. 아모스서는 말합니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5:21).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해 절기를 지키고 성회들을 진행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자신들에게 복이 임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절기를 미워하고 성회를 기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은 말합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은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5:24). 하나님에게 정의가 상실된 절기는 무의미하며 공의가 배제된 성회는 기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배를 위해 모였습니다. 하지만 삶 속에 정의가 부재하다면 일체의 종교적 행위는 무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일상은 주일의 예배와 필연적으로 연결됩니다. 결국 예배의 성패는 일주일간 우리 삶으로 결정됩니다. 이것이 바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입니다. 삶과 단절된 예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사랑교회의 예배가 그러길 바랍니다. 불행하고 참담한 왕복달리기를 피하기 위해 말입니다.                                                                                                                                배덕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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