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중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있습니다. 대학시절에 그의 자서전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초라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는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서 인도를 해방시킨 위대한 정치가요 사상가입니다.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솔직히 고백하는 부분에서 그의 인간적 단면을 확인할 수 있었고 한 학생의 도벽을 고치기 위해 단식을 단행하는 대목에선 참다운 스승의 진수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영국군인 한 사람 때려눕힐 재주가 없지만 그의 정신적 힘은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모한다스란 그의 이름 대신 마하트마란 칭호를 붙여 기억합니다. 마하트마는 “위대한 혼”이란 뜻입니다. 물론 간디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독실한 힌두교 신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따랐지만 마지막까지 기독교인이 되길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수 많은 기독교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 미국의 대표적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2세 목사 한국의 심오한 기독교 사상가 다석 유영모 선생 등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수많은 기독교 사상가/운동가들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영제국이란 강력한 물리력 앞에서도 그는 일체의 동요나 타협 없이 평화와 진리를 붙들었습니다. 그 위대한 정신 앞에 세상의 권세들이 무릎 꿇었습니다. 그렇게 인도가 해방되었고 흑인들이 민권을 획득했습니다. 정신의 힘입니다. 에스겔서의 절정은 골짜기에 흩어져 있던 마른 뼈들이 성령의 바람 속에 생명을 회복하여 거대한 군대로 일어서는 환상(37장)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창세기 첫 장의 천지창조가 떠오릅니다. 흑암과 혼돈 위에 여호와의 신이 운행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빛이 탄생하는 장면 말입니다. 또한 진흙 덩어리에 여호와의 숨이 들어가자 그가 생령이 되었다는 서술 말입니다. 이 모든 장면들은 죽음 속에 하나님의 영(정신 spirit)이 들어가 생명이 탄생하는 극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물론 신비주의적 관점에서는 성령의 임재현상으로 합리주의적 관점에선 이성에 의한 계몽현상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양자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성령이나 이성이 결여된 인간은 비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령의 주된 사역이 이성의 억압이나 부정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주된 기능은 조명이며 이것은 이성의 기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정신 차리게” 하는 것이지요. 특히 육신의 횡포가 극에 달한 세속의 시대에 성령은 우리의 정신에 죽비를 내리쳐 정신이 깨어 있게 만듭니다. 우리가 단지 육신의 덩어리가 아니라 ”마하트마” 즉 위대한 혼임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런 면에서 정욕을 부추기는 종교는 사이비요 정신의 힘을 부정하는 것은 이단적 행위입니다. 참다운 종교는 성령의 힘으로 인간 정신의 힘을 극대화하여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종교입니다. 우리의 종교가 그래야 합니다. 배덕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