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2011-07-16 답답하다 그리고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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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정의롭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인간의 삶에는 규범과 원칙이 있지만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친 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교실 안에서 배운 것과 교실 밖의 세상은 참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교과서적”이란 말은 “비현실적”이란 뜻이며 이상을 발언하는 “설교”는 “쓸데없는 잔소리”와 동일시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교육은 힘을 잃고 종교도 길을 잃었습니다. 교사들은 넘쳐나지만 스승은 부족하며 종교인은 범람하나 구도자는 희귀합니다. 타락한 세상의 구원은 불가능해 보이고 세상을 구원하려는 노력마저 허망해 보입니다. 종교는 무성하지만 정작 신의 존재는 막연해 보입니다. 뒤틀린 세상의 현실입니다. 세상의 현실이 하도 기막혀서 냉철한 철학자 칸트는 신의 존재를 감각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으나 윤리적 차원에서 신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후에 신의 심판이 없다면 도무지 타락한 인간들이 도덕적 삶을 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팡세』의 저자인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종교가 일종의 도박이며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보다 긍정하는 쪽에 배팅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가 막상 죽은 후에 신이 존재하면 정말 큰 낭패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가 부조리한 현실에서 어떻게 하든 정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지적인 몸부림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에도 저자는 하나님께 정의의 회복을 촉구했습니다. 가난한 자와 고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악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있다면 이 땅에 존재하는 마지막 악까지 찾아내어 제거해야 한다고 절규했습니다. 정말 겸손한 자들에게 천상의 축복이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세상은 악한 세상이며 세상이 그 지경에 처하도록 방치하는 신은 죽은 신이거나 무능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어도 마땅한 한심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름뿐인 신은 의미 없습니다. 세상의 정의를 지키거나 확립하지 못하는 신은 필요 없습니다. 그런 신은 이미 신이 아닙니다. 저희 교우들의 고민을 들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많습니다. “저렇게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왜 사는 것이 그토록 힘들까? 왜 늘 당하기만 할까?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무엇하고 계시나? 과연 나는 저들에게 계속 설교할 수 있을까? 저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정말 끝에 가서 저들이 웃을 수 있을까? 정말 그럴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런 질문과 흥분 자체를 신성모독의 증거로 몰아붙입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이런 질문 자체를 묵살하며 우리의 믿음 없음을 정죄합니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맞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이 시편 기자의 절규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외침에 동참하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시9:12-15). 속이 시원합니다.                                                                                                                                                                                배덕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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