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2013.02.03. 삶의 역설 신앙의 신비

주사랑교회 0 1,817

삶의 역설 신앙의 신비 저는 어릴 때 고기를 일체 먹지 않았습니다. 가정 형편상 자주 먹지도 못했지만 어쩌다 돼지고기를 넣은 음식이 밥상에 오르면 참 힘들었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정신 줄을 놓고 먹는데 저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큰 맘 먹고 입에 넣으면 돼지비계의 물컹거리는 느낌에 욕지기가 나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볼 때마다 어머니는 예외 없이 “쯧쯧 없는 집에 태어난 놈이 그렇게 입이 짧아서 큰일이다”며 핀잔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어떻게든 먹어보려했지만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먹기 싫은 음식이 있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 보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삶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정말 싫지만 먹고 하고 만날 수밖에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힘들고 삶이 고통스럽게 됩니다. 황당하고 속상하고 화가 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때 그랬기 때문에 삶이 정상적이 되고 심지어 풍성해졌다는 것을 깨닫곤 합니다. 사실 삶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삶을 요청합니다. 신앙의 역설과 신비가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바울을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자신을 따르던 사람 대신 부정하고 박해하던 바울 말입니다. 제자 아나니아는 눈먼 바울을 고쳐줍니다. 사랑하는 성도가 아닌 교회의 원수 바울 말입니다. 또한 바울은 예수를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존경하던 스승 가말리엘 대신 증오했던 이단 예수를 말입니다. 성경에서 이 장면만큼 기이하고 역설적인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없었다면 현재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 교회사의 신비는 바로 이렇게 형성되었습니다. 평생 원수로 지낼 것 같았던 사람이 절친한 벗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평생 미워할 것 같았던 사람에게 결정적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결코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정말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사자와 아기가 함께 뛰놀며 마른 뼈가 살아나는 성경의 신비가 우리 삶의 현실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배덕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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