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모든 일은 자주하다보면 익숙해지고 잘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경험이 축적되면서 전문가가 됩니다. 그래서 초반의 위기를 잘 넘기고 일정 기간 훈련을 쌓으면, 어떤 분야에서든 일정한 수준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특정한 영역의 전문가들은 예외 없이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초보자들에게 인내를 갖고 훈련을 반복하며 포기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렇게 같은 일을 꾸준히 반복하다보면, 익숙해지고 마침내 전문가가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도무지 그렇게 되지 않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설교하는 일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이후부터 설교를 시작했으니, 벌써 20년 가까이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거의 빠짐없이 일주일에 한번은 설교를 했습니다. 초등학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회중을 대상으로 설교를 쉬지 않고 했습니다. 이 정도의 세월동안 설교를 했으면, 이 정도의 설교 경력이 쌓였으면, 이제는 좀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도무지 그렇게 되질 않습니다.
신학교에 갈 무렵에는 설교를 하고 싶었습니다. 기회만 주어지면 강단 위에서 멋지게 해낼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의 횟수가 늘고, 설교한 세월이 더해 갈수록, 설교에 대한 부담도 더해갑니다. 어느 집사님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목회자는 어느 순간에도 설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목회자는 호언장담했습니다. “설교자는 어느 본문을 펼쳐도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저는 그런 주문과 장담 앞에 기가 죽을 뿐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요?
성경을 읽을수록, 성경의 의미를 단답형이나 사지선다형의 퀴즈처럼 답을 적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동안 교과서 요점을 암기하듯 떠벌렸던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천박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으며, 깊은 수치감을 느낍니다. 더욱이 설교가 단지 성경에 대한 지적 이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삶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목회적 실천과 성과가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는 인식에 이르면, 도무지 강단에 오를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선생이 되지 말라”는 바울 사도의 충고가 이제야 묵직한 펀치가 되어 저의 뒷머리를 칩니다. 너무도 성급하고 철없이 강단에 올라 떠들었던 지난 세월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그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오늘도 또다시 강단에 올라야 하는 현실이 무섭습니다. 그러니 어찌 맨 정신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에 취하지 않고선 말입니다. 주님, 불쌍한 종을 도우소서!
(배덕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