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교회 안에서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저급한 신앙의 증거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걱정은 이방인들의 몫이라고 주께서 비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며 주께서 사탄을 꾸짖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향 때문일까요? 순복음교회의 축복교리를 교양 있는 신자들은 기복신앙의 대표적 예로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교회의 지배적 문화로 이미 뿌리를 내린 듯합니다.
사실, ‘양식을 위한 기도’에 대해 주께서 경고하신 것은 물질에 대한 집착의 위험성을 인식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물질적 욕구충족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위험도 감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조종하는 도구로 기도를 남용할 가능성도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복음교회의 급성장에서 축복교리가 결정적 역할을 했고, 그런 성장이 복음의 능력보다 욕망의 분출일 수 있다는 우려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습니다.
그럼에도, ‘떡’으로 상징되는 “일용할 양식”이 주님의 관심에 벗어난 적은 없습니다. 주님은 떡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우리 삶에서 그것의 중요성을 간과한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떡 자체보다, 그것이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는 현실, 그로 인해 “소자”들이 소외되는 부당한 현실에 관심을 집중하신 듯합니다. 부자의 집 앞에서 굶어 죽은 나사로의 비유, 소자를 대접하는 것이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란 교훈, 아이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을 통해, 떡을 나누는 삶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설명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이라고, 그리고 ‘오래’ 먹을 양식이 아니라, ‘오늘’ 먹을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내 양식’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픔입니다. 그 기도는 반드시 ‘우리의 양식’으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많은 성도들이 오랫동안 혼자 먹을 양식의 비축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수치입니다. 오늘 함께 나눠먹을 수 있다면 행복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오병이어’는 그런 교훈의 가장 혁명적인 예입니다.
웅장한 예배당의 그늘에 굶는 이웃의 존재가 가린다면, 성령님은 굶주린 자와 함께 하기 위해 예배당 밖에 거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빵을 얻지 못해 사람들이 허기 속에 울고 있다면, 윤기 흐르는 교인들의 감미로운 찬송은 하나님의 귓가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많이 가졌지만 더 달라고 떼를 쓰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모질게 등을 돌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겸손하고 정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배덕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