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집과 학교의 중간쯤에 제과점이 생겼습니다. 소보로빵을 팔았는데,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신비로운 맛이었습니다. 저는 그 빵의 고소한 맛에 완전히 넋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와 집이 4km나 떨어져 있었지만, 버스를 포기하고 집까지 1시간을 걸어왔습니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빵을 사먹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소보로가 너무 맛있어서, 한 시간의 고생쯤 은 기꺼이 견딜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뜨거운 사랑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해선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너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처가댁의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는 매우 타당하고 당연했습니다. 우리 집은 가난했고, 저의 미래는 불투명했으며, 무엇보다 우리가 너무 어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어떤 반대도, 불확실도, 심지어 세월마저 기꺼이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30살이 되어 유학을 떠났습니다. 돈도 없고 영어도 형편없었지만, 학위를 마치고 돌아오겠다는 각오로 7년을 버텼습니다. 돈이 없어서 늘 불안했습니다. 영어 때문에 수없이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성적이 나빴고, 원했던 학교에 입학하지 못했을 때는 낙심하고 절망했습니다. 하지만 학위를 마치고 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돈과 영어로 인한 근심과 수치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수없이 낙망하고 절망했지만, 그 쉽지 않았던 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제 50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지난 세월 동안, 예수는 나의 빵, 사랑, 학문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그토록 거룩해 보였던 저의 기도, 예배, 찬양, 묵상이 실은 개인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종교적 몸짓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나이에도 빵, 사랑, 학문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지 않고, 저의 종교는 그 틀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지고 싶습니다. 더 이상 예수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고, ‘나를 위한 예수’보다, ‘예수를 위한 나’로 살고 싶습니다. 정말, 그렇게 늙고 싶습니다. 그렇게 남은 시간을 살다 가고 싶습니다.
배덕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