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예수님은 형이상학을 논하신 적이 없다. 추상적 철학적 용어로 하나님을 표현한 적도 없다. 예수는 늘 사람과 삶에 집중했고, 이 땅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를 꿈꾸었다. 그의 성육신 자체가 그런 열망의 증거요 실현이었다. 히브리인들은 그렇게 삶과 역사 속에서 경험된 하나님을 토대로 자신들의 종교를 형성했다. 그래서 구약에는 형이상학이 부재하고, 인간의 삶과 하나님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리스 형이상학의 절대적 영향 하에 탄생된 기독교신학에선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 삶도 역사도 없다. 온통 감각과 이해를 초월한 낯선 용어와 논리만이 무성하다. 삶이 부재하니 이해하기 어렵고, 인간이 부재하니 늘 낯설고 어색하다. 그래서 신학자와 성직자가 지배했던 교회는 쉬지 않고 이단논쟁과 마녀사냥에 몰두했다. 그 시절엔 화형대에 불이 끊이지 않았고, 십자군과 추방이 멈추지 않았다. 이론적으로 교회는 구원의 통로였지만, 현실적으로 교회는 죽음의 칼을 휘둘렀다. 이것은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의 동일한 역사였다. 세상은 그런 교회를 두려워했고, 교회는 그렇게 세상 안에서 세상과 멀어졌다.
이런 교회의 현실에 절망했던 사람들이 사막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이해불능의 신학논쟁 대신, 초월적 신비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알고 싶어했다. 어떤 이들은 사막이 아니라,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 탐구 대신, 그분의 가르침을 삶 속에 실천함으로써, 복음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세상은 ‘성자’라고 칭송했고, 그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적에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타종교인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사회적 약자들을 먼저 찾아가고, 사회적 불의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을 퍼붓고, 스스로 청빈을 실천한다.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 교회 안팎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인들이 다시 교리문제를 내세우며 교황의 방한을 반대하고, 가톨릭과 교황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다. 교황보다 더 관용적인 목사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교황제에 대한 개신교의 공격은 공허하다. 교황보다 목사들이 더 사회적 약자들의 친구가 될 수 없다면, 마리아숭배에 대한 개신교의 비판은 설득력이 없다. 교황보다 목사들이 더 강력한 정의의 사제가 되지 못한다면, 연옥과 미사에 대한 개신교의 반대는 무의미하다. 교황보다 목사들이 더 작은 차를 타지 않는다면, 가톨릭의 과거에 대한 개신교의 디스는 쓸데없는 짓에 불과하다.
부디, 교황 프란치스코의 인기와 방한이 한국교회에게 반면교사 혹은 전화위복이 되길 원한다면, 한국교회는 사람, 생명, 그리고 삶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사람에게 주목하는 것을 인본주의라고 비판하지 말라. 생명과 삶에 대한 관심집중을 자유주의라고 욕하지 말라. 성경은 한번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분하거나 차별한 적이 없고, 인간을 배제한 예배, 생명과 삶을 부정하는 신학을 명령한 적도 없다. 오히려 땅을 포기하고 하늘에만 집착하는 종교, 인간을 배제한 채 신에게만 몰두하는 예배, 성과 속을 철저히 구분하는 신학이야말로 전통의 이름으로 성경을 무시하고, 보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왜곡하며, 정통의 이름으로 진리를 조롱했다. 이런 비극은 교회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구교와 신교 모두가 공범이다. 과 거의 수치스런 기억일 뿐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인 고통스런 현실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교황 프란치스코와 싸울 때가 아니다. 새 삼스럽게 가톨릭과의 교리적 차이를 부각시킬 필요도 없다. 배 가 아파도 좋은 것은 배워야 한다. 약이 올라도 잘하는 것은 칭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번 기회를 통해, 한국교회가 더 성숙할 수 있다. 더 좋은 교회가 될 수 있다. 그래야 살 수 있다.
배덕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