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2009-06-14 저의 죄와 수치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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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는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예언’입니다. 지혜는 목회를 시작한 이후 저에게 화두처럼 따라다닌 단어였습니다. 사실 제가 목회자가 되길 소망했을 때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설교’였습니다. 저는 훌륭한 설교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설교에 재능이 있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설교는 단순한 ‘말재주’가 아님을 절감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목회는 설교만으로 되지 않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제가 섬겨야 할 여러 사람들 제가 결정하고 처리해야 할 많은 일들 심지어 제가 가르치고 설교해야 할 많은 내용들 모두 ‘지식’뿐만 아니라 ‘지혜’가 필요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입니다. 끝없이 밀려오는 사람들 선택들 그리고 설교들 앞에서 저의 아둔함으로 인해 심각한 혼란과 고통이 발생합니다. 다양한 문제로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적절한 조언을 주고 힘겨운 장애물 앞에서 현명한 결정을 내리도록 돕고 처한 상황에 적합하며 실천 가능한 대안들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데 정작 저의 입에선 진부하고 피상적 언어만 되풀이 되는 것 같아 참 속상하고 부끄럽습니다. 목회자의 어리석음은 정녕 죄입니다. 제가 씨름하는 또 하나의 화두는 ‘예언’입니다. 예언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학교 강단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교회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저에게 요즘처럼 예언의 의미가 심각하게 느껴진 적이 없습니다.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를 짊어질 신학도들에게 과연 선생으로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작은 개척교회를 섬기는 교우들에게 과연 목자로서 무엇을 설교해야 할까요? 저의 강연 앞에 진지한 눈으로 반응하는 청년들에게 어떤 예언을 선포해야 할까요? 이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을 향해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할까요? 진정한 예언은 희생의 피를 각오하지 않고는 결코 선포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제가 얼마나 용기를 낼 수 있을까요? 이 시대를 위해 그런 예언자를 찾고 계신 하나님 앞에 과연 저는 ‘나를 보내소서’라고 반응할 수 있을까요? 시대의 요청과 주님의 뜻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도무지 일어서지 못하는 저의 비겁 앞에 치가 떨립니다. 목회자의 비겁은 정녕 수치입니다. 보다 지혜로운 목회자가 되고자 보다 용감한 예언자가 되고자 부족한 종이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립니다. 부디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성숙한 지혜와 거룩한 용기를 배우고 실천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정녕 주님의 은혜가 눈물겨운 밤입니다. 저의 죄와 수치로 인해…   배덕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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