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2014.10.12. 기독교여, 유토피아주의를 넘어서라!

주사랑교회 0 1,622

기독교여, 유토피아주의를 넘어서라!

목사의 딸로 태어났으나, 결국 무신론자가 된 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교회 가는 것이 당연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교회생활이 무미건조해졌다고 합니다. 부모님 때문에 의무감으로 예배에 참석했지만, 직장 때문에 집을 떠난 후로는 예배참석을 중단했습니다. 후에, 아버지가 딸의 이런 상황을 알게 된 후로, 아버지와 딸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겼습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기도원이라도 다녀오라고 강권했으나, 딸은 더 이상 무의미한 신앙생활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저항했습니다. 그렇게 종교적 갈등이 가정의 위기로 발전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진리로, 예수를 구주로, 그리고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믿으며, 진리는 자유를, 예수는 구원을, 그리고 교회는 친교를 제공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경우처럼, 성경, 예수, 교회가 자유와 구원과 친교를 제공하는 대신, 억압과 권태와 갈등을 초래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목사들은 성경을 진리하고 설교하지만, 신자들의 일상에서 성경이 설 자리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에 예수는 분명히 구주로 경배되지만, 험난한 현실 속에서 예수와 구원은 너무 막연해 보입니다. 또한 신학서적 속의 교회와 직접 체험하는 교회 사이에는 차이가 큽니다. 이처럼, 이론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 신앙은 늘 위기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학교선생님들은 공산주의에 대해서, 이론은 훌륭하지만 현실적으로 실천하기가 불가능하므로, “유토피아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는 끊임없이 선전되고 실험되었지만, 현실 속에서 자신의 이론을 제대로 구현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교회의 모습도 공산주의와 많이 닮아 보입니다. 성경, 예수, 교회의 가르침은 무척 고상하고 아름답지만, 기독교의 현실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도 유토피아주의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특별히, 최근 한국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스캔들과 파행들을 보면, 이런 추측이 확신으로 변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목사의 딸 이야기는 오늘날 보기 드문 예외가 아닙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무신론자로서 자신의 자리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익명의 무신론자들’이 갈등과 번민 속에 앉아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적 갈등과 양심의 가책 속에 자신을 괴롭히면서 말입니다. 물론, 성경의 가르침을 모두 이해할 순 없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유토피아주의는 아닙니다. 분명히, 이해하고 실천하기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앞에 여전히 성경, 예수,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 예수, 교회가 자유, 구원, 친교 대신 억압, 권태, 갈등의 원천이 되지 않기 위해선, 우리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있어 보입니다. 최소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지적 양심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신앙적 갈등에 대해 솔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성도간의 친교 속에서 차이와 갈등도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진정한 적은 무지가 아니라 거

짓이며, 예수의 일차적 원수는 불신이 아니라 맹신이고, 교회의 가장 무서운 질병은 갈등이 아니라 굴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유토피아주의를 힘들지만 분명히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이 길을 가는 이유입니다.

배덕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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