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언제 성스러움을 느낄까요? 종교가 다른 문화현상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특징은 무엇일까요? 보다 구체적으로 기독교가 진리임을 기독교인이 진정한 구도자임을 확인하는 대목은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한 수많은 답이 존재하겠지요. 분명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저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답은 바로 기도입니다. 신 앞에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으며 고개 숙인 그 모습은 언제나 범접할 수 없는 거룩의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정녕 기도는 인간이 포유류의 한계를 벗고 성스러운 존재로 거듭나는 가장 고귀한 방법이며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거룩하며 심지어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한 기도마저 길을 잃고 방황하는 현실은 아픔입니다. 기도가 이기적 욕구 충족을 위한 종교적 방편으로 선전되는 순간 기도는 저급한 기복신앙의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기도가 거룩한 구도의 방편 대신 맹목적 신비체험의 도구로 남용되는 순간 기도는 수치스런 주술적 도구로 추락합니다. 이기적 욕망의 성취를 기도응답으로 기도자의 영성을 기도시간의 분량으로 기도를 교회성장의 도구로 방언을 기도의 진수로 규정하는 현실은 가히 ‘신성모독’입니다. 정숙한 여인이 순결을 잃었을 때 추함이 더하고 명장의 손에 빚어진 청자의 흠을 용납할 수 없듯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행위 기도가 타락할 때 그로 인한 악취와 상처는 차마 견딜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4-25절에는 기도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요점은 두 가지입니다. 기도가 하늘에 닿기 위해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며 이웃의 허물을 용서해야 합니다. 즉 믿음과 용서가 진정한 기도의 두 축이요 원리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며 동시에 용서에 대한 의지적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용서로 표현된 이웃사랑의 결단이 전제될 때 하늘을 감동시킵니다. 양자는 분리될 수 없는 기도의 안과 밖입니다. 오늘은 설 전날입니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을 나누는 고귀한 시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상께 제사를 지낼 것이며 신자들은 예배를 드립니다. 특히 성도들이 모여 예배할 때 특히 한해의 첫날에 드리는 예배에서 가족들이 함께 진정한 기도를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기도를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한 돈독한 믿음으로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용서를 다짐하며 드리는 기도에 주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 기도를 통해 하늘의 문이 열려 하늘과 땅이 소통하고 가족 간의 길이 뚫려 서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새해 첫날 복된 기도로 은혜와 감동이 충만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배덕만 목사